(사)대한장기협회 편집국장 최민혁 三段(사진=브레인스포츠투데이 DB)
(사)대한장기협회 편집국장 최민혁 三段(사진=브레인스포츠투데이 DB)

[월간 기담(棋談)]

{1} 재주 부리는 코끼리

 코끼리는 신령스럽고 똑똑한 동물이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선생은 <<열하일기>>의 <상방(象房)>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余畀象奴一扇一丸, 令象呈伎. 象奴少之, 加徵一扇. 余以時無所携, 當追給, 第先使效伎. 則象奴往諭象, 象目笑之, 若落然不可者. 使從者, 增畀象奴錢. 象睥睨久, 象奴數錢納囊中, 然後象乃肯, 不令而效諸伎.[내가 코끼리 부리는 사람에게 부채와 환약 하나씩을 주고, 코끼리에게 재주를 부리게 시키라고 했다. 그는 그 값이 적다며, 부채 하나를 더 달라고 했다. 나는 지금은 (부채를) 더 가지고 있지 않고, 나중에 마땅히 추급(追給, 추가로 더 줌)할 것이니 먼저 코끼리 재주를 보여 달라고 했다. 곧 그가 코끼리를 달래 재주를 부리게끔 했으나, 코끼리는 눈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자로 하여금 코끼리 부리는 사람에게 즉시 돈을 더 주도록 했다. 코끼리는 오래도록 흘겨보더니, 그가 돈을 세서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본 뒤에야 수긍하고 시키지도 않은 온갖 재주를 부렸다.]"

 코끼리가 이와 같듯이, 장기판 위의 象도 겉보기에는 둔해 보이지만 잘 활용하면 다른 기물들은 해낼 수 없는 재주를 부리기도 한다.

 

{2} 象, 장기의 상징

 이 象은 장기에서 가장 독특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象은 대기물 중에서는 가장 약하다고 여겨지고, 士나 卒兵 하나를 취하고 죽는 것은 예삿일이다. 어쩌다가 象으로 卒兵 둘을 취하고 죽게 되면, '양득에 성공했다'고 해서 장기를 거의 이긴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象은 다른 대기물들에 비해 찬밥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象은 장기를 대표하는 기물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장기를 '상희(象戱)'라고 일렀다. 車, 包, 馬 등을 제치고 象이 장기라는 놀이의 상징(象徵)이 된 것이다. 지금도 사전을 펼쳐 보면 '장기'의 동의어로 '상기(象棋), 상혁(象奕)'이 제시되고, 중국 장기의 명칭 또한 '샹치(象棋)'다.

 車와 馬에는 강하고 기민한 기상이 담겨 있고, 士와 卒은 숭고한 희생정신을 품고 있다. 象은 그 독특한 위상만큼이나, 특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장기짝이다.

 

{3} 象 밭 맞추기도 어려운데

 장기짝의 행마법은 새겨진 글자의 의미와 꼭 닮아 있다. 象의 행마 또한 코끼리의 움직임과 닮았다.

 <<열하일기>>에는 <상방> 외에 코끼리에 관한 글이 한 편 더 있다. <상기(象記)>는 <상방>과 마찬가지로 연암이 북경에서 코끼리를 보고 남긴 글인데, 코끼리를 소재로 삼아서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논하는 글이다. <상기> 말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象遇虎則鼻擊而斃之, 其鼻也, 天下無敵也. 遇鼠則置鼻無地, 仰天而立.(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곧 코로 쳐서 죽이니, 그 코가 천하무적이다. 하지만 쥐를 만나면 곧 코를 둘 곳이 없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을 뿐이다.)"

 코끼리가 호랑이를 손쉽게 제압하는 것은 덩치가 훨씬 크기 때문일 것이고, 코끼리가 쥐를 어쩌지 못하는 것도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덩치 큰 象은 보폭이 넓어서 먼 거리를 단숨에 뛰쳐나가서 宮이나 車 따위를 위협하지만, 발밑에서 서성거리는 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서 처리가 힘든 것이다.

 초보들에게 象 쓰는 법을 가르칠 때, "象이 앞으로 한 밭 가려면 몇 수가 필요하겠습니까?"라고 묻고는 한다.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象을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며 머리를 싸맬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車와 卒은 한 수, 包는 두 수, 馬는 세 수면 충분하지만 象이 거쳐야 하는 다섯 번의 움직임은 찾기가 힘든 것이다. 고작 한 밭 가는 데 다섯 수나 빙빙 돌아야 하니, 象 밭 맞추기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03 象이 93으로 가는 길을 설명한 그림. 象이 저 멀리 있는 車를 잡으러 가는 데는 세 수면 되지만, 코앞에 도달하는 데는 빙빙 돌아서 다섯 수나 걸린다.

 

 앞서 인용한 구절 바로 뒤에는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將謂鼠嚴於虎, 則非向所謂理也. 夫象猶目見而其理之不可知者如此. 則又況天下之物萬倍於象者乎?(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가 아니다. 코끼리가 오히려 눈에 보임에도, 그 이치를 가히 알지 못함이 이와 같다. 또 하물며 천하의 만물이 코끼리보다 만 배는 이치를 알지 힘들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면, 코끼리가 눈에 명확히 보이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코끼리에 대한 이치를 잘 알지 못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현상(現象)들은 더욱이 그 이치를 알기가 힘들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도 장기와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象 밭 맞추는 길도 알기가 힘든데, 하물며 장기 한판에 담긴 무궁무진한 길과 심오한 기리를 쉽게 깨달을 수 있을까?

 

{4} '象'의 심오한 뜻

 필자가 앞서 '상징(象徵)'과 '현상(現象)'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밖에도 '상감청자(象嵌靑瓷)', '상형(象形), 대상(對象), 사상(四象), 삼라만상(森羅萬象), 형상(形象)' 등에 '象' 자가 쓰인다. 이렇듯 '象'이라는 글자는 '코끼리'라는 뜻에서 시작했지만, 더 심오한 뜻을 갖게 됐다. 한비자(韓非子, B.C.280~B.C.233)는 이렇게 설명한다.

 "人希見生象也, 而得死象之骨, 案其圖以想其生也. 故諸人之所以意想者皆謂之象也.[사람이 살아 있는 코끼리를 볼 일이 거의 없으니, 죽은 코끼리의 뼈를 얻어서, 그 그림을 그려서 살아 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래서 뭇 사람의 의상(意想, 마음속에 지닌 뜻이나 생각)을 모두 '象'이라 이른다.]"

 또 <상기> 맨 마지막(앞서 인용한 <상기>의 구절과 바로 연결된다.)에, "故聖人作易, 取象而著之者, 所以窮萬物之變也歟.[그래서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 '象' 자를 취해 저술한 것도 (코끼리 같은 것을 보고)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궁구하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한비자>>의 <해로편>에 따르면 '象'은 실제 형체를 알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모양이고, <상기>에 따르면 '象'은 만물이 변화하는 이치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象'은 본뜻인 '코끼리' 외에 파생 의미인 '상징, 형상, 징조, 용모, 상상' 등의 의미로도 쓰인다. '像(모양 상)'과도 의미가 비슷하다. '像' 자가 생기기 전에는 '象'과 '像'이 담당하던 의미의 영역을 모두 '象'이 소화했을 것인데, 이후 '像' 자가 생겨나며 '형상, 조각이나 그림, 본보기' 등의 의미를 나눠 가졌을 것이다.

 여담으로, '형상'이라는 낱말은 '形象' 또는 '形像' 모두 쓸 수 있을뿐더러, '형상(形狀), 형상(形相)'과도 의미가 매우 유사하다.

 

{5} 외국의 象, 재상(相)과 주교(bishop)

 장기 이야기로 돌아와서, 다른 나라 장기에서의 象을 살펴보자. 샹치(象棋, 중국 장기)의 象은 수비 기물로, 대각선으로 두 칸을 가는데 멱이 막히면 가지 못하고, 장기판 가운데에 있는 강을 건너지 못한다.

 


샹치. 相/象은 대각선으로 두 칸을 가는데 가운데의 강을 건너지 못한다. 아흔 밭 중에서 일곱 밭밖에 밟지 못하는 셈이다.

 

 그림을 보면, 샹치는 같은 기물이라도 편이 다르면 표기가 다르다. 검은 편의 상에 '코끼리 상(象)' 자가 적혀 있는데, 붉은 편의 상에는 '서로 상(相)' 자가 적혀 있다. 相/象이 자신의 진영에서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相'은 싸움에 나서지는 않고 나라 안에서 국사를 보는 '재상(宰相)'의 의미인 듯하다.

 체스(chess, 서양장기)에서는 비숍(bishop)이 우리 장기의 象에 대응되는 기물이다. 체스는 장기, 샹치와는 달리 기물에 글자를 새기지 않고 기물의 모양으로써 그 역할을 표시한다. 비숍은 주교의 모자를 본떠 만든 기물이고, 체스보드(chessboard, 체스를 두는 판) 위에서 대각선으로 몇 칸이든지 움직인다.(대각선으로 움직이는 車라고 생각하면 된다.)

 

{6} 노끈과 코끼리

 장기를 둘 때 왼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집중하다가 뜬금없이 오른쪽이 허물어지는 경우도 있고, 오른쪽만 쳐다보다가 왼쪽에서 밀리는 경우도 있고, 정면으로 공격할 것만 생각하다가 좌우의 수를 놓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군맹무상(群盲撫象), 군맹평상(群盲評象)이라고도 한다.]"이다. 겨우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 본 장님은 "이놈 코끼리, 네소문이 너무 높기에 얼마나 큰가했더니 겨우 요꼴이냐. 가늘고 기다란 츰이 굵은 노끈이로군."[김동인(金東仁, 1900~1951)의 수필 <군맹무상>의 한 구절이다.] 하며 코끼리를 노끈 취급했지만, 눈을 뜨고 코끼리의 모습을 똑바로 보는 사람들은 코끼리가 굵은 노끈 따위가 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동물이라는 것을 안다. 장기판 앞에서도 눈을 감고 노끈만 만지작거리듯 국부의 수만 볼 게 아니라, 눈을 크게 뜨고 장기판 전체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7} 참고 문헌
박지원, <<열하일기>>, 1780.
이홍식, <연암 박지원의 「상방」과 「상기」의 상호텍스트성 연구>, <<동양한문학연구>>, <동양한문학회>, 2018.
한비, <해로편>, <<한비자>>.
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7.
김동인, <군맹무상>, <<박문>>, 박문서관,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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